[짘경] shall we dance - 2

2020. 5. 12. 01:48 from 글/연재




"경아, 이거 좀 봐줘."
점심을 조금 넘긴 이른 오후. 한참 의뢰와 관련된 자료를 들여다 보고있던 지코는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던 경을 불렀다. 읽고있던 책을 내려놓고 지코에게 다가온 경은 고개를 숙여 그가 던넨 자료를 들여다본다. 금세 집중을 하며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듯 멍해지는 두눈을 보던 지코는 경의 허리에 살짝 팔을 두른다. 그리고 큰 힘 들이지않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익숙해서인지 혹은 집중해서 모를일이지만 경은 큰 저항 없이 당기는 힘에 자연스럽게 지코의 허벅지 위에 앉는다. 서류를 위아래로 살피며 몰두하는 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코의 입끝이 슬며시 올라간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목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를 바라보던 그는 어느새 자신의 손이 그쪽에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손가락이 감겨왔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감각이 더욱 지코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행동이 귀찮을 법도 한데 경은 여전히 종이 위 글씨에 온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다.
"슬슬 머리 자를까?"
"응..."
경이 순순히 대답했지만 지코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경의 턱을 살짝 잡아 자신을 보게 돌렸다. 그제야 경이 지코와 마주 보았고, 그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이거, 봐달라고 한건 너거든요."
종이를 탁 소리나게 손가락으로 치며 말을 하는 경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분명 제가 말하는데 봐주지않았다고 저런 표정을 한것이 틀림없을거라 경은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은지, 지코는 경이 들고 있는 종이를 빼앗아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 던저 버린다. 별말 없이 지코를 응시하는 경과 그런 시선을 읽은 지코는 조금 전 얼굴을 구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듯 표정이 바뀐다.
"머리 자를까?"
"언제는 내맘대로 했냐? 니 마음대로 하세요~."
개구지게 마주 웃는 지코의 얼굴을 보고 경은 기가찬 말투로 대꾸했지만 어느새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 작은 나이프를 쥔 지코는 여전히 경을 제 허벅지에 앉혀두고 신중한 표정이었다. 경은 일과 관련한 지코의 진지한 얼굴을 수없이 봐왔지만 이럴때의 얼굴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심각한 일을 다룰때와 비슷하지만 또 그만큼 무겁지는 않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였지만 이런 표정은 아직 새롭게만 느껴지는 경이었다. 서걱,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살짝 스치는 지코의 손을 느끼자 경은 어딘가 잘게 소름이 돋아났다. 제 머리카락이 닿을땐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공연히 부끄러워진 경은 제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누군가 그렇게 하자고 정한 적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지코는 경의 머리를 손수 잘라주었다. 다른이에게 맡기지 않는것은 지코의 솜씨가 나쁘지않은 탓도 있었지만 경은 자신의 머리를 그 이외에 맡길 생각 조차 못하고 있는 탓도 컸다.
능숙하게 머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의 손재주에 대해 생각에 잠기는 경이었다. 머리만 좋아서 되는것이 아닌 자리가 지금 그의 위치였다. 남을 이끄는 통솔력과 상황을 가장 유리하게 볼수있는 판단력. 필요에 따라 날렵히 움직일 수 있는 몸.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가진 그였기에 이런 자유로운 무리들은 어려움 없이 이끌수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거기에 머리속에서 이런저런 구상이 떠오르면 곧바로 개발부로 내려가 곧장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수 있는 재주까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경은 괜히 심통이 난다.
한참 머리를 자르는데 집중하던 지코는 조용한 경의 얼굴을 힐끔보고 그거 어딘가 뿔이 난것을 깨달았다. 지코가 경의 기분을 살피느라 나이프를 잠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잘린 머리카락이 떨어진 몸을 털어주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은 경은 지코의 팔을 맵게 내려쳤다.
"아, 뭔데?!"
"얄미워서."
"내가 너 머리도 잘라줬는데?!"
웃기네. 내가 원하는대로는 절대 못자르게 하면서. 경은 지코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
언제나 경의 머리를 잘라주던 지코는 어느순간부터 슬금슬금 경의 뒷머리를 다듬긴해도 자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경이 눈치챘을때는 지금의 머리 길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나쁘지 않아했던 경이었지만 그것도 잠깐, 언제나 머리카락이 목을 덮고있자 슬슬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참던 경이 뻥하고 터져버린 날, 지코의 아지트로 달려온 그는 별안간 품에 있단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눈 앞에 날붙이가 달려든다면 놀랐을 법도 하지만 어쩐지 지코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뭐."
"나 머리 잘라줘."
경의 말에 가볍게 손가락으로 나이프를 옆으로 밀어낸 지코는 경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얼마전에 다듬은 머리가 딱 보기 좋게 자리를 잡은 터라 지코는 고개를 저었다.
"왜 지금 예쁜데."
"예쁘긴! 간지럽고 거추장스럽단 말이야!"
뒷머리를 움켜쥔 경이 신경질적으로 잡아 당겼다. 저러면 안아픈가... 경의 행동을 바라보던 지코는 혼자 생각에 빠진다. 경은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음에도 별다른 행동도 말도 없는 지코를 보고 더욱 심통이 났다. 여유로운 태도가 더욱 경을 약올리는 결과를 부르는 것을 모를리 없을텐데 지코는 그저 경의 머리를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경은 그가 절대로 잘라주지 않을 것을 눈치챘고,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제 뒷머리로 가져갔다. 일단 싹뚝 잘라머리면 지코 또한 어쩔수 없을 것이라 생걱했다. 하지만 그런 경의 생각은 손쉽게도 저지당했다. 언제 눈치챘는지 어느새 경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챈 지코는 다른 손으로 이미 나이프를 뺏어들고 있었다.
"어딜, 이런거 얼굴 근처에 막 가져가는거 아냐."
자신의 얼굴 근처에 갔던 것은 생각 안하는건지 지코는 짧게 혀를 차며 빼앗은 나이프를 두어번 던지고 잡더니 뒤로 휙 던져버린다. 낡았다고 하더라도 콘크리트 벽에 콱 박히는 나이프가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지금 두사람에겐 그것이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경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버렸고, 머리를 자를 다른 무언가를 찾더라도 방금 전처럼 그에게 뺏길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경은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못 자르게 하는데!"
씩씩거리며 이유를 물어오는 경의 태도에 순간 지코가 행동을 멈추고 묘한-하지만 어딘가 꿍꿍이 있는-표정을 짓는다. 그걸 경이 모를리 없어서 한번 더 재촉하자 입꼬리를 한쪽 씩 올려 웃는다. 별안간 변하는 그의 표정에 본능적으로 주춤 한발짝 뒤로 도망가려던 경은 어느새 양 손목을 잡고있는 지코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불쑥 경의 귓가에 입을 가져간 지코가 잠시 뜸들이는가 싶더니 낮게 속삭였다.
"너 목덜미. 존나 야해."
"...뭐?"
말을 바로 이해 못한 경이 멍한 얼굴로 되물어왔고 지코의 얼굴은 조금 전 보다 더 엉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 좋으라고... 나만 볼거야, 나만."
쐐기를 박는 지코의 마지막 한마디에 경은 어이가 없었다. 허, 참내... 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이 타져 나왔고 어딘가 맥이 풀려버리고 말있다. 별다른 말 없이 얌전해진 경을 이리자리 살피던 지코가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경은 근처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고, 달궈진 붉은 귀를 지코는 모른척 해주었다.
그 날 이후 경은 지코에게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조르는 일은 없었다.





경의 머리를 다 자르고 난 뒤, 지코는 급하게 밖으로 나갈일이 생겼다.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경의 하는둥 마는둥 배웅을 받으며 지코는 마지막까지 만족스랍게 잘린 머리를 바라보았다.
해가 막 넘어가 푸른 어둠이 찾아왔을때 쯤 안으로 돌아온 지코는 공터에서 모여 놀고 있는 무리 중 경을 쉽게 찾을수있었다. 반대로 그의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과 분위기가 바뀌어 버리기에 경 또한 지코가 왔음을 눈치챘다.
"왔냐?"
무심하게 뱉은 말투와는 다르게 담뿍 웃음이 담긴 얼굴로 맞이하는 경은 일정한 거리에서 멈춰있는 지코를 발견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저 어딘가 응시하고 있는 지코의 모습에 경도, 주변 사람들도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경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툭 건드려 보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멍한 시선이 가까워진 경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다. 머쓱 해진 경이 그의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을때, 한참만에 굳은 지코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너... 뭐야?"
두서없는 그의 말에 경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잠시 지코의 시선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와 가까워지고나서야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달은 경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 할수 있었다. 해가 떠 있을때만 해도, 아니 지코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목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깨끗하게 잘려나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드러난 흰 목은 지코의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괜히 그런 느낌이 든 경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러본다.
"아... 이거 그게... 그러니까..."
이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충분히 말하면 괜찮을거라고 내내 생각했던 경이지만 막상 그와 마주하고 그의 태도를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도 말이 없어지고 지코는 여전히 굳어있고, 주변인들은 그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점차 지코의 표정은 놀라 굳은 얼굴에서 가라않은 얼굴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은 평온과는 거리가 있는 얼굴이었다. 큰 변화 없이도 순식간에 차가워진 표정에 어떤이들은 저도 모르게 한발짝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 급변한 분위기를 감지한 경은 뒤늦게 지코의 얼굴을 마주보았고 살벌해진 표정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경은 지코를 끌고 아지트에 도착했고, 별다른 반항없이 손쉽게 끌려온 지코는 여전히 경의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모를리 없는 경은 한숨을 깊게 뱉었다.
"너 가고나서... 애들이랑 놀아주다가 머리에 뭐가 붙었어. 떼려고 하다 난리가 나서 자를수 밖에 없었단 말이야."
"....."
"조금만 자르려고 했는데 위치가 안좋아서 거기만 자르니까 이상해져서..."
경의 말이 점점 작아지며 흐지부지하게 말을 끝냈지만 그동안에도 지코는 말이 없았다. 경은 자신이 상황을 설명했을때 지코가 아 그러냐, 하고 간단하게 넘어가는 반응을 바란건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무반응은 그의 상상속엔 없었다.
어색하게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 경의 생각이 별안간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쪽으로 생각이 방향을 잡자 경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너 나 머리때문에 좋아하냐?"
엉뚱하게 터져나온 경의 말에 지코의 무표정이 깨졌다. 마치 경의 말이 뒷통수를 치고 지나간듯 순식간에 얼빠진 표정으로 변한 지코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어? 그런거 아냐."
"아니긴! 너 지금 머리 잘랐다고 화났잖아. 내가 모를까봐?"
버럭 소리치는 경을 보고 지코는 곤란했다. 물론 현재 자신의 감정은 경이 말한대로였지만 이유는 틀렸다. 순식간에 감정의 위치가 뒤바뀌어버린 상황에 이번엔 지코가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렀다.
"아니, 머리 자른건 어쩔수 없는데..."
그럼 뭔데! 경은 당당하게 이유를 요구하는 얼굴로 지코를 노려보았다. 하던 말을 천천히 멈추며 짧게 생각에 잠겼던 지코는 느릿하게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머리, 누가 잘랐어?"
머쓱해하던 말투는 어딘가로 휘발되버리고, 오히려 씩 웃으며 말하는 지코의 눈빛은 서슬이 담겨 있었다. 분명 웃고있는데 세상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본 경은 조금 전 자신이 화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난 경은 이후는 굳어버린 몸을 움직일수 없었다. 누가에 조금 더 힘이 실린 말투는 분명하게도 지코가 그에게 화를 내고 있지않음을 경은 눈치 챌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넘어선 날카로운 분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소유욕이 강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한번 내것이라 생각이 된다면 그걸 지키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민감하기에 서로를 파탄으로 밀어 넣을수 있다는 걸 잘 알아서 서로의 것을 탐하지도, 건들지도 않는것이 이곳의 가장 기본적인 룰이었다. 그 룰안에는 당연히 두사람도 해당했다.
지코에 분노의 원천은 정확하게 경의 머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는 경의 긴머리를 좋아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때 살짝 흔들리는 모습도,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을때 스치는 손끝의 감각도 좋았다. 경이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지 못하니까 제 취향것 긴머리를 유지 시킨 지코였지만, 경이가 진심으로 자르고 싶어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수있었다. 지코의 소유욕은 다른자에겐 절대 제 머리를 내주지않는 경의 마음 그 자체였다. 경은 그런 의도가 없을수도 있었지만 그의 머리를 만질수 있는 권리를 지코에게 내어준것 같았다. 그것을 누군가가 침범해버렸다고 느낀 순간 지코의 분노는 조용히 일어났다.
나도 미쳤지만 저 놈은 더 미쳤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코의 감정을 파악한 경은 섬뜩한 감정에 밀어 넣어졌다. 경은 자신의 머리를 잘라준-사실 경또한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누군가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대답할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말하기엔 후폭풍이 엄청날 것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내, 내가 잘랐어."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생각보다 먼저 터져나온 말에 경은 순간 아차 싶었다.
"정말?"
"응..."
경은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냥 그것을 밀고 나가기로했다. 대답하는 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지코는 싱긋 웃기 시작했다. 그 표정을 마주한 경은 어색하게도 따라 웃지 못하였다. 경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때 저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화를 내는 얼굴이었다.
"넌 왜 중요한땐 거짓말을 못하냐. 평소엔 사기꾼이면서."
"......"
"누구야."
물어보는 말이었지만 끝은 내려가 있는 말투는 경도 몇번 들어본적 없는 위험 신호였다. 누구라고 대답하면 분명 어디 하나는 잘못될 것이 경의 눈앞에서 스쳐지나갔다. 대답을 하지않아도 더이상 자신에게서 대답을 듣지않고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위해 여럿이 고통받을 것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경은 타인을 크게 신경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원인이되어 부는 피바람을 원하진 않았다. 창백해진 경은 지코에게 매달리듯 그를 붙잡았다.
"나야, 내가 자른거 맞아!"
"야...너..."
"그냥 그렇다고 해줘!"
경이 다급하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행동이지만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드디어 웃는 얼굴이 무너진 지코는 이를 뿌득 갈며 낮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길래 경이 네가 이렇게 감싸지...?"
망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진 경의 머리 속인 평소 계략과 계획이 자리하던 곳엔 절망으로 가득찼다. 그러다 한줄기 실낱같은 생각이 별안간 떠올랐다.
"믿어주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차가운 불같은 분노에 휩싸인 지코는 순간 경의 말에 머리를 빠르게 회전 시키고 있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듯 고요한 그의 모습에 아차 싶은 경이었지만 이미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잠시후 지코는 여전히 분노가 느껴졌지만 제법 누그러진 얼굴을 하고 경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엔 보이지 않았던 여유를 담은 미소와 함께 한껏 자애로운 흉내를 내는 말투로 경이게 미소 지었다.
"좋아, 너 약속했다?"
환하게 웃는 지코를 보자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그냥 적당히 그때 옆에 있었던 무리들을 다 말할까하는 충동까지 일았다. 스스로 호랑이굴에 걸어들어가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경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지코는 아주 만족스럽게 웃어버렸다.
이후 소원은 지코에게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건 한참 뒤의 일 이었다.

Posted by Cake_z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