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 눈을 떴을 때 친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불빛 하나 켜있는 방은 어두웠지만 경에게 익숙한 곳이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센터 안 치료실에 온전히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적은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나 뭐 하고 있었더라.
몸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경은 머리 회전 속도가 평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이 끊어지기 전 기억을 떠올리려 했던 경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낯선 느낌을 깨달았다. 한참 몸살을 앓다가 깨어난 것처럼 온몸이 기진맥진 했지만 원인은 이미 빠져 나간 가벼운 느낌에 경은 어리둥절했다.
제 몸을 낯설어 하면서 이리저리 보던 끝에 자신의 오른손을 누군가 잡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침대 밖으로 벗어나 있는 손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누군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이 방안에서 유일하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 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지만 그 사람의 정체를 쉽게 알지 못했다. 어두운 방은 그림자가 짙었고, 결정적으로 고개까지 살짝 숙이고 있어서 더욱 알 길이 없었다. 경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잡힌 손은 최대한 움직임이 없게 슬며시 일어나는 것에 성공한 경은 졸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신중하게 응시 했다. 아무리 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경은 어리둥절했다. 이 방안에서 이렇게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이드 일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경은 불현 듯 뇌리를 스치는 기억을 붙잡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모르고 있었지만 그 외 그의 옷차림 등을 보자 경은 쓰러지기 전 상황이 머릿속에 파도같이 밀려왔다.
기억과 함께 폭력적인 감정이 떠오르자 데인 것같이 놀란 경은 그에게서 몸을 멀리 떨어트렸다. 잡고 있던 손을 거둬가느라 그를 건드리게 되었고 때문에 선잠에 빠져 있던 남자는 부스스 눈을 떴다. 잠시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는 천천히 경에게 초점을 맞췄다. 침대 구석으로 뒤로 물러난 경은 시선이 마주치자 혼란한 기분이 되었다. 기억의 끝을 더듬어 떠올려 봐도 남자의 감정에 휘말려서 주변 상황은 기억이 잘 나진 않았다. 하지만 어찌됐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에 저 남자가 있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혼란해 하는 경을 바라보던 남자도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안간 경의 뱃속에서 꿀렁거리는 느낌이 갑자기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의문을 품는 사이 머리도 핑 도는가 싶더니 힘없이 앞으로 푹 엎어졌다. 이번엔 그마나 다행인지 정신을 잃진 않았지만 불쾌한 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몸이 옆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어 경이 그쪽을 쳐다보니 남자가 자신을 옆으로 밀어 눕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게 그늘진 남자의 표정은 뭐라 형언 할 수 없이 복잡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남자는 고개를 숙여 경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경은 그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지만 너무나 기이하게 느껴져서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얼어 있었다. 그저 입술이 닿는 순간부터 머리를 뒤흔들던 두통도, 불쾌하기 짝이 없던 눈 녹듯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것 외엔 경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가볍게 스치는 혀끝에 머뭇거림이 남아 있지만 멈추는 일은 없었다.
한참 후에서야 남자는 경의 눈을 제 손으로 덮고 나서야 입술을 거둬갔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혼란해진 경은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잡아 내렸다. 조금 전 일이 진짜였는지 헷갈릴 정도로 남자는 조금 전과 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폭주까지는 아니어도 이 안이 엉망이란다. 더 자둬.”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경의 머리 위에 올려둔 남자는 손을 떼지 않고 다른 손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멍해진 얼굴로 그저 남자의 행동만 빤히 주시하던 경은 남자의 태도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너도 알거 아냐. 몸이 회복하는 동안은 접촉하고 있는 게 좋은 거.”
“그게 아니라...”
말이 이어지자 남자는 머리에서 손을 거둬가더니 경의 손을 붙잡았다. 잡힌 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경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남자가 잡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외 행동들은 여전히 납득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이해 범위에서 남자의 행동을 분석하려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한 경을 눈치 챈 남자는 후, 길게 한숨을 뱉는다.
“난 센티넬이 싫긴 하지만 내 앞에서 사람 죽는 거, 그것도 나 때문이라면 더 싫거든. 일단 생각 닫고 좀 자라.”
이미 남자는 한숨 자려는 모양인지 눈을 감았다. 고요해진 방 안. 경은 딱히 남자의 말 대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말을 끝으로 시끄럽게 돌아가던 머리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음 가득한 머리가 이렇게 조용했던 적이 언제였지. 순식간에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찾아온 정적의 편안함에 경은 밀려오는 잠이 낯설고 반가웠다. 이미 반쯤 감겨버린 눈으로 잡힌 손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경은 남자가 자신의 손을 깍지로 바꿔 잡는 것을 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
경이 완전히 회복하는데 꼬박 이틀이 넘게 걸렸다. 덕분에 계속 의자 신세를 졌던 남자는 얼굴이 피곤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경은 남자의 눈치를 보며 센터 의사에게 몸을 검사 받았다. 남자는 하품을 여러 번 하면서도 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남자는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섭게 손을 거둬 갔다. 내내 남자에게 잡혀 있던 손이 풀려나자 괜히 머쓱해진 경은 반대편 손으로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팔짱을 끼고 나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남자는 의사와 경을 날카로운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꺼지라는 의도가 다분한 눈빛에 의사는 도구를 챙겨 서둘러 방을 나선다.
“야 나와.”
남자는 의사가 나가자마자 경의 앞에 서서 낮게 말했다. 경은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빤히 바라보다 눈만 깜빡일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짜증 묻은 얼굴로 경을 거칠게 당겨 침대에서 내보내더니 자신이 그 자리에 길게 눕는다.
“못 잔만큼 잘 테니까 깨우지 마라.”
경은 남자가 낮게 코를 골며 잠이 들 때까지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남자가 내내 앉아있던 의자로 가서 앉았다. 벽을 마주보고 누운 남자의 등을 지그시 바라보던 경은 곧 생각에 잠긴다. 무엇으로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언제나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뛰어난 머리는 이럴 때 그다지 쓸모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뒤엉키는데도 평온하기만 감정을 느끼고 혼자 놀라는 경이었다. 머릿속도 마구잡이로 앞 다투어 튀어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그래도 보통 사람정도 복잡했다. 그 이유를 찾던 경은 남자와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감정과 능력이 컨트롤 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경은 더욱더 남자에게 욕심이 생겼다. 앞에 놓인 길이 가시밭길인걸 알아도 그 너머가 너무나 유혹적여서 경은 기꺼이 그 길로 가기로 결심했다.